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단 편집) === 말년 === [youtube(k-gDJwfrdHs?t=530)] 1978년, [[미하일 고르바초프|미래의 서기장에게]] 수상식을 하는 브레즈네프.(8분 37초부터) 브레즈네프는 막상 절대권력을 완전히 구축한 뒤부터 건강이 나빠졌다. 브레즈네프는 술과 담배를 좋아했고[* 특히 고급 술과 담배를 수집하는것을 즐겼다.] 그 때문에 말년에 브레즈네프는 각종 성인병으로 고통받았다. 담배 자체는 1970년대에 건강 악화로 끊긴 했지만 젊은 시절에 피어둔 담배가 결국 그에게 큰 화로 다가왔다. 1975년엔 [[심장마비]]를 겪었으며 사실상 이때 이후부터 브레즈네프는 [[유리 안드로포프]] KGB 국장,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 등의 고위 관료들의 [[집단지성]]에 의존해 통치해야 했다. 1977년 이후부터 [[페이스메이커]]도 달고 다녔으며 중추 신경계의 악화, [[뇌졸중]], [[불면증]], [[통풍(질병)|통풍]], [[백혈병]], [[당뇨병]], [[폐기종]], 기관지염 등의 질병들을 앓고 있었던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심지어 적국인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의 의료진들을 초청해 수술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얻은 불면증으로 수면제 중독도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에게 가짜 수면제를 처방하면서 그의 약물 중독을 치료해보려 했지만 체르넨코는 눈치 없이 진짜 수면제를 브레즈네프가 달라는대로 공급해주어서 별 소용이 없었다.[* 수슬로프가 죽던 날 브레즈네프 일기에는 수슬로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안드로포프가 그에게 '노란것'을 주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볼코고노프는 그 노란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금일봉일까 하는 추측을 남겼지만 나중에 수면제로 밝혀졌다.] 소련 사회에서 약물중독은 부르주아 퇴폐종자들이나 걸리는 한심하고 역겨운 것이었으므로 브레즈네프가 약물중독에 시달린단 사실은 철저히 은폐되었고 따라서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했다. 브레즈네프를 수행하던 차조프는 안드로포프에게 비밀리에 브레즈네프가 약물중독임을 알리고 이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알리자고 제안했다. 안드로포프는 이를 한동안 숨기려 했지만, 브레즈네프가 1974년에 블라디보스토크와 파리를 방문하다가 쓰러지고 1975년에 모스크바 외곽에서 또 쓰러지는 등 심각한 건강이상을 보이자 브레즈네프의 과로를 풀어준다는 구실로 그를 약물치료를 받게 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조금 건강상태가 괜찮아지자 요양소를 탈출해버렸다.(...) 브레즈네프의 약물 중독은 심각한 것이었는데, 헬싱키 회담 직후 크림반도에 휴가를 보내러 간 브레즈네프는 쓰러져서 그대로 병원으로 실려갔고, 지스카르 데스탱과의 정상회담은 국제적 스캔들로 비화되기 직전까지 갔으며 1975년 11월, 폴란드 통일노동당 7차 당대회에 초대받은 브레즈네프는 약물에 취해서 주악되는 인터내셔널가를 듣더니 흥분해서 헐떡이며 박수를 치고 지휘를 했다. 폴란드 제1서기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를 비롯한 폴란드 측 당국자들은 모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상황이 이쯤되자 안드로포프도 더 이상 브레즈네프의 약물중독을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정치국에 이를 보고하려 했지만 수슬로프가 반대하면서 브레즈네프 주위의 일부 핵심 측근만이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브레즈네프가 약물중독에 걸렸음을 눈치챈 포드고로니가 반격해왔기 때문이었다. 1975년에 브레즈네프의 새 주치의로 미하일 코사료프가 임명되어 전임 주치의 로디오노프가 아무때나 약물을 공급하는 관행을 철폐하고 약물공급권을 주치의에게 독점시켰다. 브레즈네프는 더 이상 약을 주지 않겠다는 부하들의 말에 폭발 직전까지 갔으나 이러다간 1976년 2월에 열릴 25차 당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간곡한 설득과 더불어 포드고로니가 자꾸 쑤시고 다니는 상황을 인시하고 받아들였다. 브레즈네프에게 약물을 주면서 비선실세가 되었던 니나 코로뱌코바 간호사도 해고되었다. 고르바초프 회고록에 따르면, 한번은 브레즈네프가 정치국 회의를 주재했지만, 노쇠한 브레즈네프가 회의 중간에 심각한 기억상실증 증세를 보이면서 회의 주제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태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국원들은 모두 아무 일도 없는체 이를 무시했고 고르바초프는 안드로포프를 따로 찾아가 우려를 표했지만 안드로포프는 "이보게 미하일, 우리는 레오니트 일리치를 돕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걸 다 해야 하네. 레오니트 일리치가 이런 상태여도 말이야. 이건 당내와 국가의 안정성의 문제고, 더 나아가 국제적 안정성의 문제야."라고 그를 타일렀다고 한다. 브레즈네프의 건강이 너무 나빠진 것은 뛰어난 정보 기관의 도움 없이 그를 일상적으로 보는 서방 외교관의 눈 정도로도 알 수 있어서, 서방 기자들이나 외교 대표들은 브레즈네프가 70세 생일을 넘기면 은퇴할 것으로 여겼다. 사실 브레즈네프도 너무 늙고 지친 나머지 자신의 칠순 생일 파티에 참석한 정치국원들에게 이제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늙은 브레즈네프를 얼굴 마담으로 내세운 안정된 체제에 만족하고 있던 정치국원들은 잠시 하얗게 질렸다가 앞을 다투어서 브레즈네프가 없으면 이 나라는 돌아갈 수 없다고 그를 뜯어말렸다. 이에 브레즈네프가 미국의 정당들처럼 명예 당주석 자리를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이것도 반려되었다. 이후에도 브레즈네프는 한 차례 자신의 은퇴를 정치국 회의에 상정했으나 그때도 모두가 뜯어말렸다. 사실 브레즈네프도 자신이 은퇴한 후에 서기장으로 누리는 호화로운 삶이 불가능해지는 것과 정치적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자신의 은퇴를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하진 않고 은근슬쩍 뭉개고 말았다. 자녀들과의 갈등도 잦아서[* 아들 유리와 딸 갈리나가 대규모의 횡령을 저질렀기에 브레즈네프는 자식들을 공직에서 파면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유리는 재산이 몰수되었다. 그나마 아들 유리는 아내 류드밀라 및 아들 2명과는 좋은 관계였고 80세까지 장수했으나 갈리나는 결혼을 4번이나 할 정도로 사생활이 엉망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알코올 중독에 정신질환까지 심하여 브레즈네프가 이로 인해 속을 썩였다. 이 때문에 갈리나는 정신병원을 수없이 들락거리다 결국 69세의 나이로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러시아의 남녀 간 수명 차이가 세계적으로도 심한 것을 생각하면 갈리나가 얼마나 엉망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아내 빅토리야는 매일 텔레비젼에 나오는 남편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는 것을 보고 은퇴를 권유했지만 자식놈들은 서기장의 자녀로서 얻을 수 있는 각종 비법적인 특혜를 잃고 싶지 않아서 브레즈네프에게 은퇴해선 안된다고 가스라이팅을 해댔다. 브레즈네프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없으면 찾아오지도 않고 이런 요구만 한다고 환멸을 토로하는 등 많은 스트레스도 겪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소련 인민들은 브레즈네프의 병세 악화를 두고 슬퍼하거나 연민하기는 커녕 조롱하였다.[[https://apnews.com/article/31783fd6ba9c50e477fb992ad5bab8d2|#]]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었고 [[노멘클라투라]]의 득세, 브레즈네프의 무식 등에 많은 소련 인민들이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1979년부터는 주요 행사에 불참하는 일이 잦았다. 소련은 정보 통제가 심했던 나라라 서방에서는 브레즈네프 사망설, 대역설 등이 심심찮게 제기되었고, 공식 사진도 여러차례 포샵처리가 가해졌다. 포샵처리가 안 되거나 어쩌다 찍힌 브레즈네프의 사진을 보면 눈에 초점도 없고 입도 반쯤 벌리고 축 늘어진 모습이 있어 병색이 완연했다. 그는 이미 1977년 경부터 연설할 때 발음이 뭉개지기 시작하면서 건강이 안 좋음을 인증했다. 1980년 신년사만 봐도 발음이 더 뭉개지고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진다. [youtube(E66oM2iAMwM)] 1979년에 발표된 그의 신년사. 우크라이나 억양도 있는데다가 [[뇌졸중]], 치아, 시력 문제까지[* 특히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더 좋은 것을 달라는 장면이 나온다.] 겹쳐서 술취한 사람마냥 어눌한 발음이 나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0ry9DoB7wr4|1971년에 발표된 그의 신년사와 비교해보자.]]]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이 개최되고 당연히 주최국의 지도자로써 연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서방과의 관계가 틀어진 상황에서 단체로 서방 국가들이 보이콧을 한 터라 반쪽 짜리 올림픽이 되었고 모처럼 올림픽을 통해 데탕트 체제를 강화하고자 하던 그의 구상은 실패로 끝난 셈이었다. 1981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지도자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를 협박해 [[레흐 바웬사]]를 비롯한 폴란드의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 구금하라고 강요했고 결국 소련군의 직접적 군사개입을 원치 않았던 야루젤스키는[* 야루젤스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오히려 개혁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자국 군대를 동원해 폴란드 민주화 인사들을 잔혹하게 탄압한다. 비록 폴란드 인민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소련의 입김과 지원하에 벌여진 일이라 당연히 서방과 소련의 관계는 더욱 냉각되기에 이르렀고 마침 반공주의를 모토로 내걸던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소련에 대한 추가적인 제재를 단행해버렸다. 브레즈네프는 악화되어가는 상황에 분개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노쇠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밑에서도 언급된 1979년 6월, 오스트리아에서 진행된 카터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소련 측은 브레즈네프가 정상으로 보이기 하기 위해 모든 수를 동원했지만 브레즈네프가 맛이 갔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노쇠한 브레즈네프가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고 그의 건강을 염려해 건배조차도 앉아서 할 것을 제안했다. 정상회담을 마치고 다시 비행기에 오르면서 브레즈네프는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레드카펫 위를 뒤뚱뒤뚱 걸어서 비행기에 올랐는데 전세계 시청자들은 그가 넘어지는지 안넘어지는지를 노심초사하면서 보았다. 이후 1981년 11월, 생애 마지막으로 서독을 방문하여 본에서 헬무트 슈미트와 에곤 바르를 만났을 때 브레즈네프는 더 이상 정상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측근들이 건네주는 서류들을 기계적으로 받아서 낭독할 뿐이었다. 모든 실질적인 대답은 그로미코가 하였고, 서독 측은 이제 소련과의 대화에서 자신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브레즈네프가 아니라고 판단할 정도였다. 이후 1982년 3월에 [[타슈켄트]]의 항공기 공장을 방문하였다가 해당 공장 시설의 일부가 붕괴되는 사고에 휘말리며 건강에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당시 브레즈네프는 살아남았지만 쇄골과 갈비뼈 골절, 간출혈 등의 중상을 입었다. 진통제 덕에 외부 일정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지만 이미 몸 상태는 시쳇말로 맛이 간 상태였다. 사고를 두고 [[https://tass.ru/interviews/6114762|#]] [[국가보안위원회|KGB]]에서는 [[사보타주]]를 의심했지만 상술했던 성격은 온화한 편이었던 브레즈네프는 '''"간청합니다. 거기에서 누구의 머리도 베지 마십시오. 처벌하지 마세요.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안드로포프]] KGB 주석에게 부탁했다고 한다.[[https://www.gazetanv.ru/article/?id=384|#]] 그 직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도착해서 레닌 훈장을 수여하면서 아제르바이잔(Азербайджан)을 아프가니스탄(Афганистан)으로 잘못 부르는 대형 사고도 쳤지만 누구도 지적하지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사고 이후에도 주치의들의 건강 관리를 받으며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82년 11월 10일 오전 8시 30분에 모스크바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사망한지 몇시간이나 지나서 경호원들에게 발견되었고 경호원들은 그를 살려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애를 썼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후 KGB 보안책임자와 의료진이 투입되었지만 브레즈네프의 얼굴은 푸른색이었고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의 사망을 보고받은 정치국은 그의 죽음을 예견했었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자세한 설명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마지막 공개 활동은 사망하기 3일 전에 열린 10월 혁명 65주년 기념식이었으며, 사후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지고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장례 절차 및 부고를 준비하기 위해서 나중에 발표되었으나 그의 사망이 정치국에 보고되자마자 모든 라디오 방송이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장송곡만 내보냈기 때문에 인민들은 발표 이전부터 브레즈네프가 죽은 줄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인민들은 늙은 브레즈네프에게 이만저만 싫증이 난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죽자마자 [[고인드립]]성 농담들이 나돌았다. >문: 브레즈네프의 유언은 무엇일까?? >---- >답: [[유리 안드로포프|유랴]]! [[찬탈|내 페이스메이커에서 손 떼]]! [youtube(1ZyDTIt3xE4)] 그의 장례식이 담긴 영상. 그가 죽은 직후에 그의 사망 소식을 발표하기 전 TV에서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백조의 호수]]를 방영했다. 이후 [[소련]] 및 [[러시아]]에서 쿠데타나 다른 [[서기장]]이나 대통령이 서거하거나 실각하는 등 나라에 [[https://www.fnnews.com/news/202306241606506283|정치적 격변]]이 일어났을 때 라디오나 TV 채널에서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이 곡이나 발레 영상[* 길이는 약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6899892&code=61171211|3시간]] 정도이다.]을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6899892&code=61171211|재생]]하는 게 [[https://www.dogdrip.net/dogdrip/408756004|전통]]이 되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주요 언론들이 그의 사망 직후 특집 보도를 했으며 로널드 레이건을 비롯해 브레즈네프가 생전에 만났던 미국 전직 대통령들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dSOPa1oItFk&t=479s&ab_channel=ShatnerMethod|#]]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